| 얼마전에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다. 대기실에서 한시간 반 정도 기다리는 동안 여러 환자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공사장에서 굴러 떨어져 골절상을 입은 아저씨, 감기가 심하게 걸려 콜럭거리는 여자 아이, 신장 결석 때문에 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젊은이. 아무튼 각양각색의 환자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은 그러한 환자들이 금세 회복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진찰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고 정작 아무런 효과 없이 나가는 모습이었다. 특히 고혈압 때문에 심한 두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봤을 때는 '저런 경우는 이렇게 치료하면 될텐데'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양방의학은 탁월한 진단법이 많다. 그에 비해 치료법은 뒤떨어진다. 한의학은 탁월한 치료법이 많다. 그러나 객관적인 진단법은 거의 없다. 양쪽의 특성을 결합한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을 것이다.
비록 한시간 반 동안의 시간이었지만 거기서 지켜본 환자들을 지면으로나마 치료해보도록 하자.
1. 고혈압으로 인해 심한 두통을 호소하는 아저씨.
대개의 고혈압 때문에 두통이 심한 경우는 경추가 압박을 받아서 그런 경우가 많다. 혈압점을 사혈해주고, 경추와 등을 다스려주는 침을 사용하면 금새 두통이 호전된다.
특히 이 아저씨는 응급실에 오면 두통이 호전되고 집에 있으면 두통이 악화된다. 얼굴 생김새로 보아 신경질이 많고 소심한 소음인으로 보여진다.
소음인은 담력이 약하여 누군가에게 의지를 하면 증세가 좋아진다. 응급실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어 두통이 덜해진다. 집에 있으면 자신을 돌봐줄 의사와 간호사가 없으므로 증세가 악화되는 것이다. 심리적인 요인과 육체적인 증상은 이렇듯 긴밀하게 서로 영향을 끼친다. 오렌지를 먹으면 소음인은 마음이 안정된다. 생강, 대추를 달여 먹으면 목뒤의 긴장이 풀려서 두통이 호전된다.
2. 신장결석 때문에 통증을 호소하는 젊은이.
말투가 깍듯하고 옷차림이 세련된 것으로 보아 소양인으로
보여졌다. 또 소양인은 장부의 특성이 신장의 기능이 약하고 췌장의 기능이 강하다. 따라서 신장결석의 증상을 앓는 경우가 많다. 외래로 접수를 하면 한참 후에나 진료를 받을 수 있어 응급실로 온 것이다.
나이는 30세 전후로 보인다. 신장 결석의 경우는 용정차나 우롱차를 자주 마셔서 결석이 나오게끔 유도해야 한다. 맥주를 마셔서 결석을 나오게 하는 방법도 있는데, 맥주는 간을 피로하게 하므로 차를 복용하는 것이 훨씬 좋다. 또 목통대안탕(木通大安湯)이나 형방지황탕가목통(荊防地黃湯加木通)을 복용시키면
효과를 볼 수 있다. 침법으로는 삼음교(三陰交)와 기해(氣海)를 다스리는 방법이 있다.
3. 감기가 심하게 걸려 콜럭거리는 여자아이.
감기는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병이다. 기관지 천식으로 발전될 수도 있고, 심한 고열로 인해 경기가 발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초기에 치료하는 것이 최상이다. 안타깝게도 한의학은 소아를 위한 시�
양약 중에서 체질에 따른 좋은 양약이 많다. 타이레놀은 태양인 감기에 좋고, 아스피린은 소양인 감기에 좋고, 부루펜과 린코마이신은 소음인, 태음인 감기에 좋다.
감기가 심하게 걸린 여자아이는 어깨골격이 좁고 평소 소화가 안되는 증상이 있어서 소음인으로 보여진다. 부루펜 시럽과 인삼, 생강, 대추 달인 물을 먹으면 좋아질 것이다.
4. 공사장에서 굴러 떨어져 골절상을 입은 아저씨.
서양의학이든, 동양의학이든 골절상에 대해서만큼은 특별한 약이 없다. 한의학에서는 골절을 치유시키는 원기를 보충하는 방법과 근육활동을 촉진시키는 방법이 있다. 우선 X-ray를 통해 정확한 골절 부위를 진단하고, 필요하면 기브스를 해야 한다.
그 환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말을 어눌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태음인으로 추측한다. 만일 태음인이면 갈근해기탕(葛根解肌湯)에 녹용(鹿茸)을 추가해서 복용하거나, 웅담을 사용하면 큰 효과를 볼 것이다. 소음인이면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에 인삼을 추가한다.
서양의학은 질병을 분석하고 객관적인 진단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질병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에는 무력한 경우가 많이 생긴다. 엄청난 검사법으로 환자를 초토화시키고 나서 정작 치료법은 주사나 알약 복용이 전부이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병은 안낫고
검사하는데 지쳐서 그냥 왔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의학의 목적은 환자의 고통을 제거하는데 있다. 혹시 이러한 목적을 잠시 망각한 것은 아닐까?
동양의학은 명의와 돌팔이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명의는 약 몇첩만으로 중병을 치료하지만 돌팔이는 약을 수백첩 써도 증상만 악화될 뿐이다. 서양의학에서는 어느 정도 평균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반면, 동양의학에서는 그 차이가 너무 심하다.
왜 이럴까? 그것은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실력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서양의학은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제품이라면, 동양의학은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수제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응급실은 서양의학의 훌륭한 산물이다. 24시간 환자가 진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치료효과인데, 앞으로 많은 동서양 의학의 천재들이 마음을 터놓고 서로의 장점을 융합한 제3의학으로 치료를 극대화하기를 기원한다.
내 맘속의 응급실 풍경은 아프면 아픈대로 척척 나아서 글자그대로 응급한 환자가 치료되는 풍경이다.
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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