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라기 공원의 원작자인 마이클 크라이튼은 직업이 의사다. 그가 쓰는 E.R.(응급실)이라는 드라마 시리즈가 있다. 미국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간적인 시각에서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인 닥터 그린은 엄청나게 많은 환자를 짧은 시간에 능숙하게 치료한다. 환자를 보는 순간부터 환자의 정확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곧바로 그에 따른 검사를 지시한다. 그러면서 적절한 치료를 한다. 박진감 넘치는 수술 장면 역시 볼만하다.

필자는 묘한 기분을 느낀다. 과연 한의사인 내가 저런 환자를 접한다면 어떤 치료를 할까?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다른 치료법을 사뭇 실감할 수가 있다. 우선 나라면 손댈 수 없는 환자들은 다음과 같다.

○ 총맞은 환자
   당연히 총알을 제거하고 상처 부위를 수술해야겠다.

○ 교통사고 환자
   수혈도 해야 하고 다친 부위는 적절한 처치를 해야 한다.

○ 내출혈
   복부 내의 출혈은 급히 수술을 해야 한다.

○ 화상 환자
좋은 화상치료제가 많아서 치료가 효과적이다. 심한 화상의 경우에는 피부 이식 수술을 한다.

이러한 케이스들은 침으로 치료하기 힘들고, 한약으로는 불가능한 경우이다.

삼국지를 보면 화타(華陀)가 관우의 화살 맞은 부위를 수술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에 마취를 할 수 있는 약처방도 등장하는데 관우는 마취없이 바둑을 두면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동양의 명의라면 편작(扁鵲)과 화타가 유명한데, 편작은 내과의사이고 화타는 외과의사이다. 19세기에 동양은 서구 열강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모든 문물이 쇠퇴하게 되었고, 동양의학에서 한방 외과 분야의 몰락은 그 중의 하나였다.

서양의학에서 외과 분야가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마취 방법의 발전과 의료 기계의 발명에 크게 힘입었다. 또한 여러 진단 기계가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시해서 많은 사례를 비교 분석할 수가 있게 되었다.

아무튼 한의사인 내가 응급실에 있다면 어떤 치료를 잘 할 수 있을까? 아마 다음과 같은 케이스는 잘 치료할 것같다.

○ 집단 식중독
   사관혈(四關穴)과 십선혈(十宣穴)을 자침 사혈하여 단번에 소통시킨다.

○ 협심증으로 인한 심한 흉통
   내출혈이 없다면 신문혈(神門穴)과 임독 양맥을 다스려 통증을 가라앉힌다.

○ 소아(小兒) 경기(驚氣)
   사봉혈(四逢穴)을 사혈하여 치료한다.

○ 뇌출혈
   중풍 응급혈을 자침한 후, 두침과 이침 치료를 병행하여 안정시킨다.
   병세가 진행되지 않으면 뇌수술을 하지 않고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 장폐색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과 족소음신경(足少陰腎經)의 막힌 곳을 터주고 장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상 체질에 따른 대장의 이열(裏熱), 또는 이한(裏寒)을 푸는 처방을 복용시킨다.

○ 맹장염(충수염)
봉침(蜂針)으로 통증 부위를 자침하면 3회 이내에 치료된다. 흔히 맹장염이면 무조건 수술을 해야만 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봉침은 벌침을 말한다. 벌의 침에는 엄청난 기능이 있다. 소염작용, 자율신경 및 내분비계 호르몬 분비작용, 전기생리작용, 진통작용 등 각종 작용이 있으며 페니실린 효과를 훨씬 능가하는 천연 항생물질이 있다. 이러한 효과로 맹장염 이외에도 치질, 종양, 자궁근종, 유방암, 불임 등등을 치료한 사례가 세계 각국에서 발표되고 있다.

협심증으로 급히 후송된 환자가 있다고 하자. 의사는 응급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몇 가지 필요한 검사를 지시하고 심전도를 체크한다.

증상이 시작된 시간은 언제인가?
등이나 목뒤로의 통증은 없는가?
통증은 몇 번이나 발작했는가?

증상을 진단하기 위한 몇 가지 문항을 신속하게 체크한다. 그야말로 응급실의 노하우를 볼 수 있다. 증상이 심해지면 심장전문의가 수술을 시행한다. 잠시후 환자는 회복실로 이송되고 의사들은 수술의 성공을 축하한다.

이러한 장면에서 나는 '정말 수술만이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 다른 방법으로 그 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환자는 부자였는데 인색한 구두쇠였을까? 그 인색한 마음이 가슴의 기를 막히게 하고 협심증이 된 건 아닐까?
아니면 다혈질이고 급한 성격이어서 매사에 성급한 결론을 맺는 마음이 협심증을 만들었을까? 또는 세심하고 민감한 성격인데다 융통성없이 앞뒤가 막혀서 협심증이 되었을까? 갖가지 원인을 생각해 본다. 이렇듯 감정과 정신의 불안이 질병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특정한 스트레스는 특정한 질병을 만든다. 질병을 갖게 된 환자는 반드시 필연적인 성정(性情)의 불화가 있었을 것이다. 치료 후에도 재발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병을 만든 성정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의사들은 오직 당장의 치료에만 급급할 뿐, 치료후의 상태나 치료전의 과정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나 관심이 없다. 또 증상에만 관심을 두고 증상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현대 의학은 육체에만 관심이 있다. 정신이나 감정에 대해서는 의학 외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질병의 원인을 알 수가 없다. 과연 육체만 아파서 온 병이 얼마나 될까? 외상(外傷)이나 전염병 등일 것이다. 대부분의 질병은 정신과 감정의 문제에서 파생되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질병이 왜 생겼는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동의수세보원에 있는 태음인 당뇨병 환자의 예를 들어보자.

이 病은 반드시 不治는 아니다. 이 太陰人 少年이 病에 걸려 藥을 쓴지 1년 뒤에야 죽었다. 이 病의 원인은 사치와 향락을 일삼아 慾火가 밖으로 치달아서 肝熱大盛, 肺燥太枯한 데에 있다. 이 小年이 마음을 편안히 하고 욕심을 버리고 100일 동안 藥을 썼다면 어찌 치료되지 않았겠는가!
病을 얻은 날부터 죽는 날까지 하루도 慾火가 밖으로 치달리지 않은 날이 없기 때문이다.
속담에 "先祖의 德澤은 비록 일일이 갚을 수 없으나 恭敬하는 德澤은 일일이 그 보답을 받지 않음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 태음인 환자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대충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환자의 당뇨병 원인은 사치와 향락을 하루도 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 선생님은 진단했다. 다른 의사와 달리 동무 선생님은 질병을 정신과 긴밀하게 연결해서 이해하셨던 것이다.

만일 E.R. 드라마에서 당뇨병 합병증으로 이 환자가 죽었다면 의사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라고 말할 것이고, 환자의 보호자가 슬퍼하는 모습이 화면에 나올 것이다. 정말 아무런 잘못 없이 죽었다면 억울한 일이다. 분명히 그 환자에게는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을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친 이유는 환자 자신의 노력이 없었던 것이 첫째요, 정확한 자기 병의 원인을 몰랐던 것이 둘째요,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이 셋째이다.

필자는 E.R. 드라마를 보면서 감동도 느끼지만 서양의학이 중요한 것을 빠트린 채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휴머니즘도 좋지만 질병의 원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함께 한다면 더 좋은 드라마가 될 것이고,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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