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료가 끝난 후 그날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본다. 제대로 치료하고 있는 것인가? 그 환자는 왜 잘 낫지 않는 걸까? 또는 나의 생각보다 더 놀라운 치료 효과를 보는 경우는 무엇 때문일까? 등등의 생각들로 그날의 진료를 정리한다. 수십 명의 환자들이 저마다 다른 환경과 다른 질병 원인, 치료태도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치료 효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왜 병이 생겼는가를 알아야 치료가 가능하다.
몇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
1. 협심증에 걸린 어느 스님
평소에 후덕하고 인자해서 많은 신도들의 존경을 받는 주지스님이 병원에 왔다. 진찰해 보니 협심증과 목디스크 증상이 있었다. 협심증이 생긴 이유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많은 신도들의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야 하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고, 또 사찰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시주를 권유하지 못하는 여린 성품도 한 원인이다.
결국 속세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계산적인 마음을 지니지 못해서 병이 생긴 것이다. 치료를 받으면 증상이 호전되다가 한동안 바빠서
치료를 못받으면 도로 악화되고 이러한 상황이 몇차례 반복되다가 결국 완치가 될 수 없었다. 스님의 주변 환경을 개선하든지 아니면 스님 자신이 그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묘책을 마련했어야 만이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
2. 초조와 불안으로 시달리는 어느 주부
배에 개스도 많이 차고 심한 불안 증상과 함께 울화가 치밀기도 하고 갑자기 슬퍼지기도 하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주부가 병원에 찾아왔다. 원인을 찾아보니 남편을 사별하고 나타난 증상들이었다. 부부관계는 서로가 의지하며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수십년간 같이 살던 남편이 어느날 죽게 되고 부인은 감정과 생각의 공백을 느끼게 된다. 적극적인 활동과 취미로 그 공백을 채워야 불안 초조를 이겨낼 수가 있다.
한달 정도 정신을 안정시키는 침치료와 장(腸) 기능을 회복시키는 체질(體質)처방으로 많은 차도가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상담을 하면서 환자의 성격과 주변 환경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환자의 체질은 소양인(少陽人)이다. 다른 체질에 비해 양보심도 강하고 활동적이며 명랑하다.
다만 자기 내면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 내가 왜 사는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내면적인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을 사별하는 갑작스런 충격을 이겨내는 내면의 힘을 키우지 못한 것이다. 상담을 하는 동안 환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인식하게 되고 주변 환경을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를 스스로 알게 되었다. 아주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3. 치질로 고생하는 남학생
치질과 피부병과 두통으로 시달리는 남학생이 왔다. 어떤 시험 때문에 고시원에서 몇 년째 공부를 하고 있다. 식사도 변변치 못하고
공부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대장이 나빠지게 되고 더 심해져 치질이 된 것이다. 대장이 나빠지면 당연히 피부도 나빠지게 된다. 또한 목과 어깨의 근육도 뭉치게 되어 두통도 생기게 된다.
우선 저녁때 간식을 먹지 못하게 했다. 해가 지고 나면 우리의 소화기관도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런데 간식을 먹으면 장(腸)에 부담을 주게 되고 몸 컨디션이 나빠진다. 그 학생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간식 먹는 것으로 풀었다. 그래서 간식 대신 녹차를 자주 마시게 했다.
녹차는 정신 안정과 혈액 순환에 좋다. 2개월
정도 꾸준히 침치료를 받는 동안 치질이 많이 낫게 되었다. 흔히들 치질은 당연히 수술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왜 생기는 지는 알지 못한다. 수술하지 않고도 치료할 수 있으며 치질이 생기는 이유는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이 대부분이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 승진을 기다리는 회사원, 사업이 어려운 경영자. 이처럼 긴장이 심한 사람들은 치질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
4. 간염에 걸린 여대생
체질이 태양인(太陽人)인 여대생이 해역(解 ) 증상과 간염으로 인한 피로증상 때문에 병원에 왔다. 해역은
허리가 약해서 발생하는 각통(脚痛) 증상을 말한다. 종아리가 아프고 다리가 당기고 저리다. 다른 체질에 비해 허리가 약한 태양인들의 특징적인 증상이다. 또 태양인은 간(肝)의 기능이 약하다 보니 간염 예방주사를 맞아도 항체가 생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태양인 여대생은 성격이 불같다. 불의를 못참고 성질이 급해서 늘 울화가 치미는 때가 많았다.
다른 체질에 비해 숫자가 적다 보니 주위로부터 유별난 사람으로 알려지는 고충도 있었다. 상담을 통해 태양인 체질의 성격과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질병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마음 수양이 되어야만 치료될 수 있는 병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큰 차도가 있게 되었다.
5.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공무원
한 공무원이 왔다. 그 사람은 고시를 패스하고 주위에서 유능하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다. 유학생활 동안에 불면증이 생겼고 과중한 업무 때문에 늘 피로한 상태를 느꼈다. 목이 긴장되고 두통이 있으며 눈이 침침하고 온몸이 쑤신다. 체질은 소양인(少陽人)이었다.
항상 직장에서 깍듯하고 경우가 바르고 앞만 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정작 자신을 위해
운동이나 취미를 가질 겨를이 없었다. 침치료로 목의 긴장을 풀어주면서 체질 처방으로 간(肝)과 심장을 좋아지게 했다. 한달만에 피로 증상이 없어지고 불면증도 많이 호전되었다. 특별히 상담할 것은 없었고 질병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불면증이 생기는 이유는 목뒤의 근육이 뭉쳐있기 때문이다. 눈이 침침한 것은 간이 피로하기 때문이며 온몸이 쑤시고 아픈 것은 대장염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으로 환자 스스로가 자기 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결과 좋아지게 되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병이
생기는 원인이 각양각색임을 알 수 있다. 의사는 환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병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에 대해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동양 의학에서는 같은 위장병이라도 사람이 다르면 다른 치료를 한다. 왜냐하면 병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사업이 어려워서 위장병이 발병했는데 어떤 약을 써본들 완치가 되겠는가? 수험생이 시험을 앞두고 걱정이 되서 불면증이 생겼는데 수면제가 치료할 수 있겠는가?
의사는 최대한 환자와 주변 환경을 파악해서 질병이 생기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챠트만 쳐다보며 치료하는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이제 의사는 사람을 쳐다보아야 한다. 그래야 질병이 생기는 이유를 알 수 있고 병을 고칠 수 있다. 수많은 검사 결과만 가지고는 그 질병을 알 수 없다. 환자를 알 때 비로소 병을 알 수 있는 것이다.
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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